
이어령

2025.10.28 00:14
Captured Moment
누군가의 깊은 숙성으로 만든 한방울의 와인 같은 기억이 어느새 아침햇살처럼 다가와 좋은 향으로 나를 깨운다. 깨어난 내가 긁어낸 글 속에서 누군가의 다시찾고 싶은 좋은 향의 기억으로 남고 싶다.
이어령의 말
이어령의 말 1 -기억, 글 25.10.28 기억은 술과도 같아서 시간 속에서 발효하고 변질된다. 기억이란 결국 시간이 낳은 또 하나의 사생아일 뿐이다. 기억의 무책임성처럼 유쾌한 것도 없다. 내가 어렸을 때 건넜던 도랑물은 아마존 유역에 그 강물보다도 더 넓고 신비해 보였다. 내 기억 속의 숲들은 오늘날 보는 그런 숲처럼 푸른빛 일변도로 우거져 있진 않았다. 그것들은 유리로 만든 나무처럼 번뜩이고 마녀의 휘파람처럼 이상한 소리로 지껄이고 있었다. 지금 돌아가보는 그런 고향은 아닌 것이다. 기억은 망각을 통해 폭력으로부터, 저항이 불가능한 그 결정적인 지배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기억은 하나의 빛처럼 텅 빈 공간을 채우고 있을 뿐 존재하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이 프리즘의 날개를 가진 형태 없는 새, 이 세상에서 가장 변덕 맞은 새이다. 기억은 단순히 사라져 버린 시간을 저장하는 창고가 아니다. 그것은 포도주를 익히는 지하실의 어둠처럼 시간과 사건과 그리고 모든 의식을 발효시킨다. 그 기억 속에서 기억의 포도알들은 일찍이 없던 향내와 빛깔을 얻어내고 한 방울 한 방울에 여름 햇살과 들판의 그 사람들을 부활시킨다. 글의 의미는 흔적을 통해 전달된다. 해변의 모래톱에 찍힌 흔적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 위에 앉아 있던 물새와 몸을 숨긴 조개들의 작은 드라마를 읽는다. 인간의 글자 역시 이 생명의 해변 위의 찍어놓은 많은 흔적들의 하나이다. 자국을 남기기 위해서는 모래같이 부드러운 것 위를 숟가락처럼 딱딱하고 뾰족한 것으로 긁어야 한다. 그래서 '밀'이라는 말은 '긁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것이라는 언어학자도 있다. 글쓴다는 것은 말을 찾는 거야. 만드는 게 아니라 찾는 거야. 대장장이가 한 개의 범종을 만들듯이 그렇게 글을 써라 걸러서는 두드리고 두드리고는 다시 녹인다. 이렇게 해서 정련된 쇳 조각은 하나의 종으로 바뀌고 비로소 쇳소리에서 맑은 목청으로 울 수 있다. 누구나 떠난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시 읽고 싶은 글들이 있다. 추억의 글, 위안의 글 같이 포옹하고 싶은 그런 생명체로서의 글이 있다. 누군가의 깊은 숙성으로 만들어진 한 방울의 와인 같은 기억이 어느새 아침 햇살처럼 다가와 좋은 향으로 나를 깨운다. • 깨어난 내가 긁어낸 글 속에서 누군가의 다시 찾고 싶은 좋은 향의 기억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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